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빌 체임벌린 (문단 편집) ==== 비판론 ==== 정치인 체임벌린에 대한 평가는 [[뮌헨 협정]]에 대한 평가와 강하게 맞물리며, 뮌헨 협정이 실패하면서 체임벌린에 대한 평가도 추락했다. > 체임벌린의 공직생활에 대해 뭐라고 말하건 그의 평판은 유화정책과 뮌헨에서의 협정과 맞물려 있을 것입니다. 그건 그가 퇴임했을때나 6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않다고 하는 주장들은 [[본시오 빌라도]]를 로마제국의 성공적인 지방행정가로 평가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 > > Duttun 2001, 리버풀 대학 1938년에 체임벌린은 뮌헨 협정을 독일과 합의하고 이를 이행하려고 하였다. 협정의 강경한 반대를 천명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를 불러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지 않으면 체코에 대한 영국의 독립보장을 철회하겠다고 협박하여 요새화한 주데텐란트를 할양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 체코의 자기방어능력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주테텐란트는 독일과 접경지역이니만큼 많은 군대가 주둔해 요새화하고 있었는데 군이 전부 후방지역으로 철수하게되었고 상당수는 주테텐란트의 할양과 더불어 독일로 소유권이 아예 넘어가면서 방어계획 전체가 누출되어 방어전략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된다. 몇달 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영토를 공격했을때는 재배치된 거점을 기준으로 한 전략계획 자체가 성립되지 못한 상태라 체코군은 혼란에 빠져 조직적인 대응을 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체코수상은 베를린으로 끌려가 무기력하게 항복문서에 사인하게 된다. 독일이 국경을 넘을 당시 체임벌린은 주데텐란트를 할양하면서까지 체코가 매달렸던 독립 보장에 따른 무력개입을 시행하지 않았다. 이같은 실책은 영국의 외교적 신뢰를 박살내었고 그 결과 유럽 대륙에서 일어날 지도 모를 전쟁을 막는데 실패했다. 참고로 이때 넘어간 군대는 체코가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해 오랫동안 예산을 쥐어짜서 건설한 강군이었는데 이게 고스란히 독일로 넘아가면서 폴란드 개전 당시 기준으로 독일 [[전차군단]]의 40%가 체코산 전차를 장비했으며 2차대전 내내 체코의 군수산업체가 생산한 전차는 독일 전차수요의 20%가량을 담당한다. 가장 잘 대비가 되어있던 아군을 고스란히 적군으로 넘겨주어 독일이 전쟁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 것이다. 히틀러는 체임벌린의 악수를 통해 영국가 프랑스가 독립을 보장한 체코슬로바키아를 당당하게 병합하고 협정을 지키지 않는 영국을 부각시켜 소련에게 영국과 프랑스와의 외교적 협력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상기시켜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결국 1년도 못 가 폴란드를 침공해 또 한번 영국의 폴란드 독립 보장을 쓰레기로 만들었고, 체임벌린은 참전을 결정했지만 [[가짜전쟁]]을 벌여 폴란드를 구원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외교적 비굴함으로 모든 동맹국이 차례차례 사라지고 영국 혼자 남게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체임벌린이 말한 '우리 시대의 평화'는 1년도 못 갔고, 그 뒤로 뮌헨 협정은 '비굴한 평화주의가 동맹국을 깡패에게 팔아먹었을 때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가 뮌헨 협정을 묘사했던 "명예로운 평화"라는 말에 대한 처칠의 반박대로, "영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명예를 잃었으며 그 결과 전쟁을 겪게 되었다." 당대에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만 먹고 만족할 사람이 아니니 강경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정치인은 있었다. [[윈스턴 처칠]] 등이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임벌린은 결국 독일을 달래기로 결심했는데 이는 독일이 군사적 행동에 들어갈 경우 대공황을 맞아 약화된 영국의 군사력이 독일을 막을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독일의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나온 오판이었다. 당시 독일은 영국 이상으로 군사력 재건이 안 되어 있었고, 히틀러의 허풍과는 달리 영국이 강경하게 나올 경우 군사적으로 맞설 능력이 없었다.[* 독일은 1939년 세계대전을 개전할 당시에도 군 재건이 완료되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군복과 보병화기조차 부족해 징집된 청년들에게 군인신분임을 증명하는 완장 하나만 준 채로 집에서 들고 온 삽 하나 메고 있는 병사들도 꽤 있었을 정도로 재군비가 아직 한창 진행 중이었다. 해군 재건속도에 맞춰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각 군의 재무장을 완료하고 개전하기로 한 초기 구상에선 개전 날짜가 1945년이었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히틀러의 벼랑 끝 외교가 [[양날검]]이 되어 본래 계획보다 무려 5년이나 당겨진 결과이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치명적인 오판을 한 셈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이 끝난 후 회고록을 펴내며 체임벌린을 "선의는 있지만 나약하고, 히틀러의 위협에 둔감했으며, 유럽 국가들이 힘을 합쳐 히틀러를 제거할 수 있음을 몰랐다"고 평가했다. 이런 오판이 단 한번만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독소불가침조약]]건에서 또 한번 발휘되었다. 뮌헨 협정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너뜨린 결과 전쟁이 닥치리라는 것은 체임벌린을 포함한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여기서도 영국의 참전을 꺼렸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민족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내걸고 있었고 히틀러의 거의 모든 연설에서 유대인을 하수인으로 삼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본가들이야 말로 만악의 근원이라는 비난을 멈추지 않았으며 영국은 그가 종결시키고자 하는 베르사유 체제의 화신과도 같은 국가였다. 따라서 영국은 독일과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체임벌린은 독일과 전쟁을 할지라도 어차피 대륙에 있는 소련과 프랑스군이 열심히 싸울테니 영국은 배후에서 지원하며 생색을 내는 정도의 파병으로 동맹군을 동원하여 참혹한 전쟁에 영국인이 끌려가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스탈린은 체임벌린 내각의 이런 꿍꿍이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며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 과정에서 1차대전 승전국은 소련([[볼셰비키]])을 대놓고 적대했고, 그 결과 소련은 러시아 제국 시절보다 영토와 영향권이 줄어들었다. 때문에 소련은 협상국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독일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일의 반소정책이 소련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 소련은 영국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 한 것인데 그 영국이 소련군을 제물로 삼을 생각 뿐이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이런 상황에서 언젠가는 끝장을 내야만하는 자본가들이야 말로 [[사회주의]]의 적이고 그간 소련를 비난한 것은 그저 영국과 프랑스의 경계심을 떨구기 위한 구호였을 뿐이었다고 구슬린다. 리벤도르프가 '''[[방공협정]]에 소련도 가입하는게 어떠시겠습니까?''' 라는 농담에 대해 '''이제 나도 반공주의자요''' 라는 스탈린의 화답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 대신 소련이 피를 흘려 독일의 확장을 막으려고 하면 독일과 소련이 함께 망해버리고 소련의 적인 영국과 츠랑스 자본가들만 득을 본다고 생각해 역으로 [[독소불가침조약]]을 맺는다. 이후 소련은 [[독일 제2제국]]의 영향권을 회복하려는 독일과 손잡고 핀란드 발트3국 폴란드를 공격하여 [[러시아 제국]]의 구영토를 회복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독일편에 선다. 소련이 독일과 손잡고 반독일 전선에서 빠지고나니 독일은 전군을 프랑스에 동원할 수 있었다. 배후의 위협없이 전군을 동원한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프랑스는 막을 수 없었고 6주만에 항복해버린다. 결국 영국은 안일한 계산으로 동맹를 차츰차츰 팔아먹다가 결국 혼자 남게 되며, 프랑스나 체코슬로바이카 폴란드에서 동맹과 함께 전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영국은 그렇게 꺼리던 대규모 육군 징병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대규모 사상자를 내게 되었으며, 영국 본토가 대규모 폭격을 당하고 수년간 혼자 본토, 북아프리카와 북유럽에서, 유럽전토를 거의 장악한 나치 독일과 싸우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체임벌린은 독립 보장과 동맹이라는 안보체제에 따른 의무에 매우 불성실했고, 영국의 외교 신뢰성은 바닥을 찍었다. 체임벌린이 총리로 있는 도중에 재무장이 시작되었다고 그를 옹호하는 의견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재무장을 시작한 시점 이전에 독일, 프랑스, 소련이 모두 주데텐란트 위기를 맞아 아예 동원령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고 모든 사람이 전쟁이 눈앞에 있다는 걸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영의 재무장의 강도는 약하고 더뎠다. 뮌헨협정 이후 1년도 넘게 지나 노르웨이 침공 때 동원가능한 병력이 고작 2개[[여단]] 3천명에 불과했다. 이미 영국은 폴란드가 침략당하는 시점에서 기술적으로 전쟁상황에 들어가있었음에도 이런 병력 수는 영국의 국력과 위상을 고려할 때 믿기 힘들정도의 책임방기에 가깝다. 이렇게 뮌헨 협정의 참혹한 폐기 이후에도 결국 그는 독일이 이웃국가를 병합하는 걸 무기력하게 방관하기만 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독일에 석권되면 [[스웨덴]]의 철광이 [[발트해]]를 통해 운송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와 덴마크에 영국군을 진주시켜 요새화하여야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독일이 침공한 이후에야 파병을 승낙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잃은 것이 결정타가 되어 모두의 외면을 받고 실각한다. 그가 실각한 원인은 영국 국내에서 그를 반대하던 처칠의 비난보다는, 그의 유약함을 끊임없이 시험하여 주변국을 하나하나 집어삼킨 히틀러에게 찾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거기다 가장 큰 문제는 체임벌린은 고작 6개월의 평화를 사기 위해 독립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사실 뒤의 옹호론은 결국 변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영국이 스스로 해야 할 도리를 완전히 져버렸다는 것이 사실 가장 큰 문제지 6개월인지 6년인지, 재무장을 했는지 아닌지는 사실 이 점에 비하면 큰 문제는 아니다. 아무리 백만가지 옹호를 하더라도 체임벌린의 평가가 결코 높을 수 없는 결정적인 원인이다. 거기에 더해 뮌헨 협정은 그 결과가 영국에 대해서건 세계에 대해서건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도 문제. 한마디로 나치 독일을 막기 위해 그 요구를 생각도 없이 전면적으로 수용한 것이 뮌헨 협정이다. 히틀러가 나중에 가서야 뮌헨 협정을 탓했다고 하는 건 변명의 여지가 될 수 없다.[* 그건 히틀러가 어리석은 탓이지 뮌헨 협정의 결과때문이라고는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뮌헨 협정의 결과로 이득을 본 것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지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었다. 애시당초 6개월 먼저 침공하든가, 아니면 주데텐란트를 뮌헨 협정으로 차지하고그 6개월 동안 전쟁 준비를 할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 둘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가 한 말은 그냥 망발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체임벌린에 대한 평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BBC]] 히스토리 매거진에서 평가한 20세기 총리들 중에서 [[제2차 중동전쟁]]을 말아먹은 [[앤서니 이든]]과 함께 0점을 받으면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체임벌린은 전쟁을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두려워한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파탄을 겁내고 있었다. 이 차이는 매우 큰데 체임벌린은 평화를 원하기는 했지만 영국이 개입되지만 않는다면 전쟁이 일어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영국의 군사예산을 줄이기 위해 독일이 소련과 전쟁을 해주기를 바랬다. 영국은 [[대영제국]]을 [[제국주의]]라 비난하며 세력을 투사해오고 있는 [[미국]]과 [[소련]] 양국가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 [[일본]]을 의도적으로 키워으며, 주변국가를 병합하는 것도 용인해주고 있었다. 체임벌린 정권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는걸 도와줬으며 단치히와 메멜에 관해서도 히틀러의 입장에 전향적이었다. 독일이 동진하면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이 어지럽게 섞여살고 있는 문제로 인종주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상극인 이 두국가가 전쟁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고 일본 역시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견제하는데 유용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정책은 세계평화를 강구하는데 목적이 있는게 아니라 주변국을 상대로 전쟁을 사주해서 나 혼자 평화로워지려는 형태의 정책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국의 움직임을 감지한 히틀러와 스탈린은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응수했고 이에 영국정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뒤늦게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막으려고 단호하게 경고하고 최후통첩을 했지만, 히틀러는 개의치 않았다. 최후통첩 무시에 따라 전쟁이 시작된 상황에서도 체임벌린 정부는 독일이 동유럽으로 동진하여 [[독일제국]] 권역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구태여 개입할 필요가 있는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히틀러의 일탈을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히틀러 역시 [[가짜전쟁]]내내 영국과 프랑스와의 적대관계는 원치않는다는 평화적 제스처를 보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체임벌린 정권은 대규모 징병은 커녕 제대로된 모병조차도 하지 않았다. 노르웨이 전역 당시 히틀러는 육군만 9개사단 공군포함 12만명을 동원했지만, 이미 전쟁이 시작된지 1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체임벌린이 노르웨이 전역에 파병을 허가한 "있는대로 끌어모았다는 병력"은 4800명짜리 정규여단 하나, 나머지는 훈련조차 받지못한 3천명의 징집병에 불과했다. 이걸로 처칠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훈련도 안받은 1만도 안되는 징집군으로 4년동안 훈련받고 실전경험까지 갖춘 10만명 + 2만명의 공군을 이길 해군장관이 누가 있는지부터 먼저 답을 해야할 것이다. 물론 애당초 '''노르웨이 전역을 기획한 게 처칠'''이었고 노르웨이에 파병된 영국군 규모가 적은 건 '''처칠이 그렇게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칠이 병력을 저정도만 확보한 이유는 노르웨이에서 독일과 싸우려고 한게 아니라 '''선수를 쳐서 노르웨이에 쳐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철광석 수출항인 나르빅 정도만 점령하고 말려 했으니 준비한 병력이 겨우 저정도였는데 '''우연히''' 독일이 하루 먼저 노르웨이에 쳐들어간거고, 영국은 노르웨이 침공을 위해 할당한 병력을 잽싸게 지원군으로 이름만 바꿔서 노르웨이로 보낸 거다. '''최대 39만에 달하는 대륙원정군은 다 프랑스에 있었다.''' 확실히 노르웨이 전역을 기획한 책임자는 처칠이었기 때문에 그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처칠이 뮌헨 협정 이전부터 늘 강경파로 활동했고 노르웨이 전역의 최초 기획도 노르웨이 전역의 철도 장악 및 독일 코앞의 베르겐 점령안까지 일찌감치 제안했지만 체임벌린이 이를 전부 불허한 것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타협책이라는 걸 간과한 것이다. 병력도 안주고 전개도 반대하고 개입시기도 끝도없이 늦춰서 독일군이 이미 장악한 이후에서나 들어가게 만들어놓은. 이 시점까지도 체임벌린은 여전히 동부 유럽에 대한 개입에 회의적이었고 히틀러의 야욕이 [[독일 제국]] 권역에 한정되어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노르웨이 전역은 '''이른바 유화론자'''라고 불리던 '''체코 폴란드등 독일제국령이었던 곳 까지만''' 중동부 약소국들을 전부 독일에게 도로 주면 히틀러가 영국에 대한 원한을 버리고 '''소련에 대한 반공십자군'''이 되어줄 거라고 믿는 자들의 믿음이 산산조각난 사건이었다. 물론 "'''독일을 이용해 소련을 공격한다.'''"라는 아이디어는 보수당은 물론 영국 정계에 널리 퍼져있었다. 처칠도 [[파이크 작전]], [[언싱커블 작전]]같은 구상을 할 정도로 소련 역시 궁극적으로는 적으로 여겼다. 이걸 독일도 알고 있어서 히틀러는 영국 인사를 만날때마다 소련에 대한 과격한 언사를 해서 영국의 환심을 사고서는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시원하게 뒤통수를 쳤다. 이때 나치당 내에서도 영국을 동맹이나 최소한 중립국으로 묶어두지 않으면 양면전선이 열려 또 패배한다고 믿던 사람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루돌프 헤스]]가 독단적으로 영국과의 강화를 주장하고 날아가거나, 2차대전 말기 [[카를 되니츠]]가 서방에 항복하는 대신 (영국이 원래 원했던대로) 소련과 계속 싸운다는 딜을 걸 수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도 초기에는 그렇게 믿었고 자주 발언했다. [[나의 투쟁]]에서 영국과의 동맹 필요성과 방법에 대한 챕터가 다수 있다.][* 물론 2차대전 후반기의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전쟁을 영국 자력으로 해냈던 1차대전 때와 달리 엄청난 차관을 빌리고 투입한 병력의 질과 수 차이 탓에 협상의 주도권은 영국이 아닌 미국과 소련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이 시점까지는 소련보다 영국을 먼저 손봐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처칠은 체임벌린의 방식으로 군축을 하여 영국군을 허수아비로 만든 채로 독일에게 당근만을 주어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긴 것만큼은 틀림없으며 심지어 전략적 적대국인 소련과 동맹을 맺어서라도 독일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소련을 독일보다 더 중대한 위험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타협의 여지가 없는 소련과 달리 나치 독일은 타협할 수 있는 대안으로 평가했지만, 정작 외교전에서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스탈린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이 거듭된 외교적 실패와 패전에 대한 책임소재의 평가로서 가장 강력한 증거는 영국 의회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체임벌린을 실각시키고 처칠을 수상으로 밀어 올린 것으로 증명된다.''' 영국 의회가 처칠이 책임을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처칠을 수상으로 추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독일 영역이었던 적이 없었던 [[노르웨이 침공]]에 착수하고 나서야 히틀러의 공격 방향이 독일권역이나 동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영국의 엘리트들은 독일과 혈투를 벌이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 '''군축의 화신''' 체임벌린 정권의 마지막이었다. 체임벌린은 나치 독일의 움직임에 대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읽지 못했다.[* 후술할 옹호론에서는 대체 체임벌린이 무슨 재주로 독일이 얼마나 재무장을 했는지 읽을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시당초 총리에 오를 정도의 정치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읽어야 하며 또한 이를 읽을 수 있도록 다양한 방면에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무능하거나 책임 방기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주변에 윈스턴 처칠처럼 미래를 예측한 인물들도 있었음에도 전혀 미래를 예측하지도 못했고 당연히 처칠 등의 말도 파국이 오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